<언어사춘기>
김경집 저 | 푸른들녘
비장의 팁을 하나 알려드리겠습니다.
교과서 두 권 구입하기 입니다.
물론 이 팁이 완벽한 대안은 아니지만 충분히 해볼
가치가 있을 뿐아니라 장기 투자로는 괜찮습니다.
한 권은 학교에 두고 한 권은 집에 둡니다.
집에 둔 책은 아이가 아니라 부모님을 위한 것입니다.
여러분 중 혹시 교과서 읽는 부모님 계신가요?
질문이 어색하고 낯설죠?
어른이 교과서를 읽을 일은 없었으니까요.
부족한 부분은 학원에 보내면 된다고 생각하잖아요.
학원 사정 역시 학교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말입니다.
일단 교과서를 읽기 전에 아이에게 진도를 묻습니다.
흔히 자녀와 대화를 강조하지만 평소에 대화를 많이 하지
못한 경우에는 막상 어떻게해야 할지 난감합니다.
그런 점에서 진도를 묻는 것도 자연스러운 대화의 방식이죠.
아이들은 부모가 진도까지 체크하며 압박한다고 느끼면서도
일면 자기에게 관심을 갖는다고 생각해
은근히 좋아할 수도 있습니다.
이때 감시나 관리를 위해서가 아니라는 느낌을 갖도록
유연하게 대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부모의 몫입니다.
아이가 진도를 알려주면 부모님은 학교 진도보다
보름쯤 앞서서 해당 부분을 읽습니다.
이때 가능하면 부모님이 함께 읽는 것이 좋습니다.
아빠의 무관심을 관행이라고만 여기면 안 됩니다.
아빠도 함께 읽어야 효과가 훨씬 더 커지기 때문에
부모님이 함께 읽으시라고 권하는 겁니다.
어른에게 중학교 교과서는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자녀의 교과서를 읽으며 자신이 중학교 다녔을 때를 상상해보세요.
지금 보면 별것 아닌데 당시엔 애먹었던 대목들이 떠오를 겁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자녀의 교과서에서 어디가 중요한지,
어떤 개념이 필수적인 것인지 등을 대략 파악합니다.
그리고 교과서에 나오는 어휘 가운데
무엇이 중요한 말인지 가려 뽑아 노트에 옮겨 적습니다.
아마 그 낱말은 대개 개념어나 관념어들일 겁니다.
이때 주의할 점은 그렇게 뽑아낸 말을
아이에게 직접 가르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당장은 효과를 볼지 몰라도 나중에 독이 되기 쉽습니다.
그 낱말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써야 할까요?
아이 앞에서 그 말을 의식적으로 써보세요.
부부가 대화할 때, 아이와 함께하는 순간에
그런 어휘들을 사용하는 겁니다.
물론 아이는 부모의 언어생활에 관심이 없을 겁니다.
그래도 뭔가 평소와 다른 어투와 어휘의 변화는 느낄 거예요.
반응이 어쨌든 아이들은 이런 식으로 '낯선' 말을 듣게 됩니다.
이해하느냐 여부 역시 확인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도 안 됩니다.
확인하는 순간 이 프로젝트의 진정한 의미가 깨지니까요.
무조건, 아이들이 그런 낱말에 '노출되게 해주세요.
그것이 전부입니다.
열흘이나 보름 뒤, 학교 수업 시간입니다.
선생님이 교과서 내용을 설명하고 있어요.
당연히 '낯선' 말과 개념입니다.
이전 같으면 그말의 생소함 때문에 귀가 열리지 않고, 뇌가
작동하지 않았을 텐데, 오늘은 왠지 그 말이 친근하게 들립니다.
어디선가 들었던 '낯익은 말이기 때문입니다.
처음 그런 낱말을 들었을 때엔 분명 한쪽 귀로 넘겼을테지요.
신경도 안 썼을 거고요.
그런데 그 말이 알게 모르게 뇌에 흔적을 남긴 겁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냐고요?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한국지리 시간이 되면 각 지역의 특산물에 대해 배웁니다.
어디에서 뭐가 많이 나고 어쩌고 하는 거 다 외우려면
머리에 쥐가 나지요. 그런데 가족과 여행을 가는 길에
나주에 들렀는데 배 과수원이 많은 걸 보았다면
자연스럽게 '나주 하면 배가 떠오르겠지요.
경험할 때엔 의식하지 못했지만 나중에 그 경험이
저절로 소환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어휘나 개념도 마찬가지예요.
'낯선 개념'이 '낯익은 개념'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내용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집니다.
하지만 이게 단순히 이해도 증진에만 머무는 것은 아닙니다.
부모님끼리 대화하는 걸 들었다거나 자신에게 말할 때 들은 건
그냥 흘려지나갔지만 막상 수업시간에 그 낱말이나 어휘를
다시 만나게 되고, 또 책을 통해 개념을 이해하게 되면,
부모님이 대화하던 당시의 상황이 신기하게도 모두 소환됩니다.
앞뒤 맥락이며 분위기까지, 자연스럽게 상황 전체에 대한
폭넓은 이해로 확장되지요. 이것은 매우 중요한 능력입니다.
단순히 하나의 개념을 이해하고 숙지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개념이 다양한 맥락과 상황으로 확장되면서
이전에 그냥 스쳐지나갔던 일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재구성하는 일이니까요.
이런 능력이 곧 창조와 기획의 능력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일석이조, 아니 일석삼조의 효과라고 할 수 있겠지요?
(77쪽~80쪽)
고학년일수록(특히 중학교) 개념어, 관념어가 많이 나와요.
추상적인 개념은 사전을 찾아봐도 한 번에 이해되지 않아요.
그 단어가 쓰인 사례를 보며, 맥락을 이해했을 때,
어렴풋이 그 의미를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예를들어 "엔트로피"라는 단어가 나왔다고 치면,
사전을 찾고 인터넷을 뒤져도 시원한 대답이 없어요.
"몰라!" 하고 넘기면 그것으로 끝나지만,
"엔트로피를 어떻게 설명하면 이해하기 쉬워질까?"
같은 질문 하나만 던져줘도, 아이는 자신도 모르게
그 답을 찾으려 합니다.
불확실함을 싫어하는 뇌의 구조 때문에,
엔트로피라는 단어에 노출 될 때마다 집중하고,
한 번 더 생각해 보는 과정에서 조금씩 조금씩
이해하는 부분이 늘어갑니다. 궁금증을 해소했을 때의
즐거움은 무릎을 치게 만드는, 가장 큰 즐거움이예요.
부모의 질문은 촉매 작용만 하면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