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없으면 내일도 없다
<나는 과학책으로 세상을 다시 배웠다>
최준석 저 | 바다출판사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 주인공 김병수는
일흔 살로 연쇄살인범이었는데 알츠하이머에 걸렸다.
그는 딸 은희를 노리는 다른 연쇄살인범을 죽이려 한다.
마지막 살인 계획이지만 그는 은희를 보호하지 못한다.
살해 계획 자체를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억이라는 과거가 무너지면서, 그의 미래도 붕괴했다.
기억, 즉 과거가 없으면 내일이 없음을 보여준다.
작가는 미래를 잃지 않으려는 알츠하이머 환자의 분투를 보여준다.
김병수는 "수십 명을 살해한 과거는 잊어도 좋다.
그건 아무래도 좋다. 지금의 내가 잊지 않으려 노력하는 게
바로 미래다. 미래, 즉 나의 계획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 알츠하이머 환자는 은희를 살리기는커녕 자기 손으로 죽였다.
살인의 순간, 그 대상이 딸인지 아닌지 그는 구분하지 못했다.
기억이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에게는 참고할 데이터베이스가 없었다.
때문에 미래를 원하는 대로 살 수 없었다.
작가 김영하는 말한다.
"미래 기억은 앞으로 할 일을 기억한다는 뜻이었다.
'약을 식후 30분에 드세요' 하는 게 미래 기억이다.
치매 환자가 가장 빨리 잊어버리는 게 바로 그것이라고 했다.
과거 기억을 상실하면 내가 누구인지를 알 수 없게 되고,
미래 기억을 못하면 나는 영원히 현재에 만 머무르게 된다.
과거와 미래가 없다면 현재는 무슨 의미일까."
나는 김영하 소설을 뇌과학 책처럼 읽었다.
<살인자의 기억법>을 첫 번째 읽을 때는 주인공인 연쇄살인범이
기억이 무너져가는데 자신의 딸을 무사히 지켜낼 수 있을까하는
스토리를 따라갔다. 두 번째 읽을 때는 김영하가 놓은
무수히 많은 기억이란 단어를 좋아가며 신경과학 책으로 읽었다.
<기억은 미래를 향한다>는 뇌과학자
한나 모이어와 철학자 마르틴 게스만이 함께 쓴 책이다.
마르틴 게스만은 "영어권 철학에서 나온 인간 마음에 관한 이론은
낡았다. 생각을 뒤집을 때가 되었다"는 도발적인 문장을 썼다.
뇌과학자 한나 모이어는 이 말을 뼈대 삼아 살을 붙인다.
"기억은 되돌아보는 능력일뿐더러 그보다 먼저
우리네가 가고자 하는 곳을 내다보는 능력이다."
기억이 미래와 관련 있다는 말이 내 뇌에 착 달라붙는다.
작가 김영하의 문장을 뇌과학자의 책에서 다시 읽는 셈이다.
저자들은 기억의 주요 과제는 "계획 수립"이라고 말한다.
한나 모이어에 따르면, "기억은 경험을 항상 새롭게 재처리하며
미래에 유용하게 쓰기 위해서 존재한다.
기억이 뒷받침하지 않으면 우리의 생각과 느낌, 숙고와 계획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기억은 인형의 실을 조종하는
막후 실력자"라고 표현한다.
무대에 선 우리는 모든 걸 즉석에서 결정하고 별다른 준비 없이
문제를 해결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게 아니다.
게스만은 "내다보기를 감행할 때 비로소 과거를
이야기하기 시작한다"는 확고한 결론에 도달했다고 말한다.
기억은 "미래계획자로 항상 사건을 앞지른다".
(194쪽~195쪽)
현재를 의식하지 않고 살면(무의식에 우리를 맡기면)
과거에 기억에 의해 늘 해왔던 선택을 반복하게 됩니다.
과거의 점들이 연결되지 않으면 미래의 방향성도 사라져요.
과거의 불행을 끊겠다는 선택 역시 과거가 있기에 가능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건 과거가 아닌 과거의 기억뿐.
과거를 경험삼아 미래를 바꾸는 것만 가능합니다.
이로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말이 증명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