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읍성과 신재효 생가

우리나라에는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형식의 성(城)이 있으니, 바로 읍성(邑城)입니다.  

낙안읍성, 고창읍성, 해미읍성이 대표적이지요.

읍성은 오늘날의 구청이나 군청처럼 

평상시에는 지방 자치 업무를 보는 행정기관(관공서) 역할을 하지만, 

유사시에는 군사 기지로 사용되는 멀티 기능의 유적지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고을에 읍성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조선시대의 행정구역을 330곳으로 나눴다면, 

그 절반 정도인 179개 지역에 읍성이 세워졌지요. 

우리나라 지도에 읍성이 있던 자리를 표시해 보면,

대부분이 서해안과 남해안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간혹 내륙에 있는 읍성의 경우도 지정학적으로 중요하거나, 

바다에서 강을 따라 내륙으로 들어오는 요충지입니다.

읍성을 쌓은 주 목적은 일본의 침략을 막기 위한 것.

그만큼 일본의 침략이 자주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역사에 기록된 일본의 침략 횟수만도 714 회,

우리는 임진왜란과 일제시대만 기억하고 있지만, 

우리가 당쟁으로 국력이 약해질 때마다 

일본은 도적떼처럼 나타나 마을을 약탈하고 사라졌습니다. 

읍성이 지어지기 시작한 것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 

특히 고려말의 정치 혼란기에 일본의 침략이 아주 많았습니다.  

이 시기에 최영 장군과 이성계가 스타로 떠오르기도 했지요.

그렇다면 179개나 되던 읍성이 지금은 어디로 갔을까요? 

1910년 일본은 읍성철거령을 내렸습니다. 

물론 전주성을 부순 것처럼 도로를 만든다는 핑계를 대긴 했지만,

숨겨진 의도는 읍성을 허는 것, 대부분이 이 시기에 헐리고, 

그나마 형체가 남아있는 읍성은 몇 개 안 됩니다.

http://e-kyujanggak.snu.ac.kr/geo/contents/con_map_list.jsp?c1=02&c2=A&c3=B08

사라진 읍성은 기록으로만 남아있지요.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 사이트에 가면

우리나라 읍성의 지도와 기록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고창읍성을 검색하니 몇 개의 지도가 나오네요. 

    *     *      *      *      *

고창읍성이 세워진 것은 단종 원년(1453년)입니다.

다른 읍성과 달리 평지에 세워진 성이 아니라서

성 안에는 마을이 형성되지 않고 행정기관만 있습니다.

고창읍성에는 총 3개의 출입문이 있습니다.

정문인 공북루, 동문인 등양루, 서문인 진서루.

3개의 성문앞에는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옹성을 쌓았고,

옹성 주변에만 여장을 쌓아서 밖을 살필 수 있는 현안과

총을 쏠 수 있는 총안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고창읍성이 유명한 것은 성을 밟는 답성놀이 때문입니다.

성곽을 따라 한 바퀴를 도는 거리는 1,684m,

머리에 돌을 이고 성벽을 한 바퀴 돌면 "다리 병"이 낫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하고, 세 바퀴를 돌면 

"극락승천"한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성 안쪽으로는 울창한 소나무 숲이 있고,

성 바깥쪽으로는 시야가 확 트여있어 전경도 시원하지요.

고창 시내의 전경이 파노라마처럼 내려다 보이는 길,

이런 산책로를 한 바퀴 돌기만해도 "다리병"까진 아니어도

최소한 무좀이라도 나을 것 같은 기분입니다. ^^

성벽 아랫길로 간간히 보이는 비석같은 돌,

자세히 보면 한자가 새겨져 있는데요,

이 성벽을 쌓은 조선초 고창현 백성들의 이름이라고 합니다.  

성벽을 한 바퀴 돌아 다시 북문 근처에 이르면 향청(鄕廳)이 보입니다.

향청은 지방자치 의회, 즉 오늘날 구 또는 시의회와 같은 곳입니다. 

보통 고을의 수령은 지방 발령을 받은 외지 출신들이지요.

고을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지 못합니다.

따라서 마을의 토박이 중 명망있는 인물을 뽑아서  

수령을 보좌하고 자문 역할을 하면서, 

향리들이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감찰하는 곳입니다.

동헌(東軒)은 오늘날의 구청이나 군청같은 곳,

수령(사또)이 머물며 지방 업무를 보던 곳입니다.

백성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고을을 평안하게 다스린다는 뜻에서

평근당(平近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고창 내아(內衙)

동헌은 보통 외동헌과 내동헌으로 나뉘는데,

외동헌은 업무를 보는 곳으로 그냥 "동헌"이라 부르고,

내동헌은 지방 수령이 머물던 살림집으로 보통 "내아"라고 부릅니다.

동헌의 건물은 주심포 양식(기둥 위에 공포가 놓인 양식),

내아는 공포가 없는 양반집의 가옥구조로 되어 있지요.

동헌 마당의 모과나무.

다른 각도에서 찍은 사진이 잘못 나와 올리지 못했지만,

이렇게 굵고 오래 된 모과나무는 처음 봅니다.

마치 관목처럼 여러 개의 가지가 모여 자란 듯 보이지만,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면 하나의 나무가 속이 썩고 비어

여러 그루의 나무처럼 갈라졌습니다.

얼마나 오랜 세월을 이렇게 비워냈을까요...

동헌에서 숲 길을 따라 올라가면 객사가 나옵니다.

객사(客舍)는 읍성 안에서 가장 서열이 높은 건물입니다.

임금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객사는 보통 임금의 궐패를 모신, 높은 건축물이 중앙에 있고,

그 좌우에 높이가 낮은 건축물이 놓인 길쭉한 형태로 지어집니다.

객사에는 "모양지관(牟陽之館)"이란 현판이 붙어 있지요.

백제 시대에는 이 지역의 이름이 "모양부리"였습니다.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키고 이 지역을 "고창현"으로 개명을 했지만, 

읍성을 쌓은 고창 주민들은 과거의 명칭인 "모양성"이라 이름을 지었습니다.

객사에서는 매월 음력 1일과 15일, 

궁궐에 있는 임금을 향해 예를 갖추었지요.

객사 안에는 임금을 향해 예를 올리는 모습을 재현해 놓았습니다.

殿(대궐 전),  闕(대궐 궐)자가 임금을 상징하는 글자입니다.

작청(作廳), 이방과 아전 등 하급 관리들이 업무를 보던 곳입니다.

업무(作)가 이루어지는 관청(廳)이라는 뜻에서 작청이라 합니다.  

관청(官廳)

작청이 하급 관리들이 업무를 보는 곳이라면

벼슬 관(官)자를 사용하는 관청은 상급 관리들을 위한 곳입니다.

안내판에는 "관아의 주방에 대한 업무와 회계를 담당하던 곳"이라 써 있습니다. 

먹거리나 음주에 대한 업무와 회계업무가 같이 이루어진다고 하니

한마디로 고위직들이 놀고 먹던 곳.

이곳에서 소리꾼들을 불러 음주가무가 이루어졌다고 하지요.  

관청이라는 이름은 어울리지 않는군요....

풍화루(豊和樓)

성 안에는 항상 우물과 연못을 파두었습니다.

전쟁이 났을 때나 화재가 났을 때를 대비해 물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연못 옆에는 이렇게 2층의 누각을 세워두었지요.

풍년(豊)과 고을의 평화(和)를 기원한다는 뜻에서

풍화루라 이름을 붙였습니다.  

연못 옆에는 지석묘(고인돌)가 있습니다.

고창지역의 명물 중 하나가 고인돌이지요.

고창 지역에만 대략 2000여 기의 지석묘가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고창읍성과 가까운 죽림리의 447기 지석묘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며 기념으로 옮겨 놓은 것입니다.

읍성마다 볼 수 있는 특이한 건물, 감옥입니다.

해미읍성이나 낙안읍성의 옥보다는 규모가 작군요.

고창현의 인구수가 적어서 그럴 겁니다.

고창읍성의 정문인 공북루 앞에는 판소리의 대가였던  

동리 신재효 선생(1812~1884)의 생가가 있습니다.

고창현에서 태어난 신재효 선생은 고창현감 밑에서 이방(吏房)을 했다고 합니다.

읍성 안의 관청에서 소리꾼들을 불러 종종 음주가무가 행해지곤 했는데,

선생은 소리꾼들의 소리에 매료되어 판소리를 정리하기 시작합니다.

집안이 부유한 덕분에 일찍 명예퇴직을 하고 다른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선생은 소리로만 전해오던 심청가, 흥보가, 춘향가, 수궁가,

적벽가, 변강쇠가를 기록으로 남기기 시작했고,

판소리 전문가를 양성하는 최초의 학교, "동리정사(桐里精舍)"를 설립합니다.

오늘날 연예기획사인 SM 엔터테인먼트, YG, JYP의 원조인 셈입니다.

생가는 현재 일부만 복원이 된 상태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동리정사는 4000여 평 규모의 대규모 공동체였습니다. 

천석꾼 부자였던 신재효 선생은 소속사 기생, 광대, 연습생이 먹고 살 수 있도록

대략 50여 가구의 집을 마련해 주었고, 마을 중앙에 작은 동산을 만들고,

마당에는 큰 연못을 파서 연못의 물이 집안을 거쳐

고창천으로 흘러들어가 만들었다고 합니다.

소속된 연예인들은 흐르는 계곡 물 옆에서 판소리를 연습한 것이지요.

선생의 제자 중에는 한국 최초의 여류명창 진채선이 있었습니다.

채선은 오늘날 "슈퍼스타K" 와 같은 대사습놀이에서

신재효의 눈에 발탁되어 동리정사 소속 연예인으로 활동합니다.

1867년, 경복궁 중건을 축하하는 행사에 참여했다가 

대원군의 눈에 띄어 운현궁의 첩실이 되고 말지요.

자유롭게 날던 새가 새장에 갖혔으니 채선은 답답했고,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당대 권력자 대원군도

그런 채선의 마음만큼은 사로잡지 못했습니다.

신재효 선생 역시 채선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고 하는데, 

채선을 그리워하며 만든 판소리 작품이 "도리화가(桃李花歌)"입니다.

  스물네번 바람불어

  만화방창 봄이 되니 너풀너풀 날아든다

  도화는 곱게 붉고 구경가세 구경가세

  희기도 흰 오얏꽃이 도리화 구경가게

스물네번의 바람과 곱게 붉은 도화(복숭아꽃)는

당시 24세였던 진채선을 뜻하고,

흰 오얏꽃은 59세의 늙은 신재효를 비유한 것입니다.

소설 속의 이야기인지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채선 역시 스승을 그리워하다가 대원군이 실각한 틈을 타

운현궁을 탈출, 병환중인 스승 신재효를 찾아갑니다.

 "운현궁으로 돌아가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습니다.

 선생님을 모시고 죽는 날까지 소리만 하며 살고 싶습니다.

 부디 선생님 곁에 있게 해 주세요."

 채선이 애절한 눈빛으로 신재효를 바라보며 간청했다.

 신재효는 눈을 질끈 감고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너는 소리꾼이다. 소리꾼은 이 땅의 만백성을 위해 살아야 하느니라.

 늙고 병든 내가 얼마나 살 것 같으냐?

 대원위 대감이 얼마나 더 살 것 같으냐?

 허나 소리는 영원히 살아 백성들의 마음속에 길이길이 전해질 것이다.

 채선아, 그 이치를 정녕 깨닫지 못하겠느냐?”

이정규 소설 <진채선>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당신도 그토록 그리워했던 채선을 돌려보내야만 하는

스승의 마음이 애절하지요.

신재효와 진채선, 흥선대원군의 이야기가

영화 <도리화가>로 만들어 졌습니다. 아직 개봉은 안 했지만, 

영화가 흥행되어 한국의 세익스피어라 불리는

동리 신재효 선생의 일생이 재조명 받기를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