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깊은 나무 박수근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 박수근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전
예술은 고양이 눈빛처럼 쉽사리 변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 깊게 한 세계를 깊이 파고드는 것이다.
- 박수근
여름 휴가 첫날, 첫번째 방문지로 찾아간 곳이 박수근 미술관,
이곳에서 "박수근 탄생 100주년 기념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미술관이 있는 강원도 양구군 정림리는 박수근 화백의
고향이자, 내가 태어난 동네이기도 했으니
그 어느 지역보다 남다른 애착이 있는 곳이었지요.
양구에 박수근 미술관이 생긴 것을 누구보다 기뻐했지만,
정작 이곳을 찾기까지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산기슭 아래 나즈막하게 자리잡은 세 개동의 미술관은
건축물 자체가 하나하나의 예술작품입니다.
성처럼 우뚝선, 견고한 느낌의 본관 화강암 외벽은
어려운 환경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걸었던
선생의 강인함을 보여주는 듯하지요.
견고한 외벽은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며 내부로 안내합니다.
외벽 안쪽으로 들어서면 서민의 삶을 따뜻하게 바라보던
선생의 내면처럼 잘 정돈된 아늑하고 편안한 느낌의
정원이 드러납니다.
"선생을 만나는 길이 쉽고 짧아서야 되겠는가?"
박수근 미술관을 설계한 故 이종호 건축가의 생각입니다.
(이종호님은 현충사 이순신 기념관을 설계하신 분,
박수근 미술관은 이순신 기념관이 진화한 듯한 느낌.)
아.... 그리고...
마당 한쪽에 홀로 앉아 계신 박수근 선생님.
인터넷에서 사진으로 미리 봤건만, 마치 예상치 못했던
장면과 처음 마주친 것처럼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전율이 느껴집니다.
창신동 마루에서 앉아 계시던 그 모습...
선생의 그림속 사람들도 저런 모습으로 앉아있었죠.
본관인 기념관에는 화가로서의 박수근과
인간 박수근의 삶과 기록물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부인에게 쓴 편지와 일기장(그와 부인의 사랑 이야기는 유명하지요)
밀러 부인과 주고 받았던 편지 등도 읽어볼 수 있습니다.
선생의 인품과 작품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공간,
작품 속의 사람들과 선생의 삶이 다르지 않았습니다.
<빨래터>는 국내 최고 경매가를 기록했어요.
47억 5천만원에 낙찰.
하지만 시대를 앞서 갔던 예술가들의 삶이 그렇듯
선생의 작품은 당시에는 그렇게 인정받지 못했고,
선생은 평생을 가난과 고독 속에 살아가야 했습니다.
원래는 부농의 집에서 태어났지만 부친의 광산 사업 실패와
홍수로 전답마저 떠내려가며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지요.
그 덕분에 학력은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
12세 되던 해 밀레의 <만종>을 보고 감동을 해서
한국의 밀레가 되겠다며 "독학"으로 화가의 길에 들어섭니다.
학연도, 인맥도, 따라야 할 스승도 없었으니,
이것이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힘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우리나라의 옛 석탑, 석불에서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의
원천을 느끼며 이를 조형화에 도입하려 한다" (박수근)
그는 화강암의 질감을 도입한 톡특한 기법을 발전시킵니다.
선생이 그린 세계는 소박한 서민들의 삶.
가난하지만 아름답게 살아가는, 꾸밈 없는 서민들의 모습을
단순한 선으로, 절제된 색체(모노톤)로,
돌에 새긴 듯한 우둘투둘한 질감으로 표현했지요.
유홍준 교수의 표현대로 "차리리 거룩한 느낌"입니다.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내가 그리는 인간상(人間象)은 단순하고 다채롭지 않다.
나는 그들의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물론 어린아이들의 이미지를 즐겨 그린다."
(박수근, 밀러부인과 인터뷰에서)
"비극을 비극으로 인식하지 않고
슬픔을 슬픔으로 인식하지 않는 그는
그냥 거울 같은 사내이다.
광폭한 현실에 대한 저항이나 비판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관심도 아니며, 때를 기다리며 견디는 것도 아닌,
그냥 사는 것!
그것은 처세이기, 순응이기도 하며 묵묵히 지키는 것이었다.
파괴되고 훼손되고 떠밀려가는 시대에서
무엇을 일구어 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에
현실에 쓸려가지 않고 묵묵히 지켜냄으로써
마침내 일구어 낸 것이다."
- 박수근 장남 박성남(서양화가)
어려운 환경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걸었던
선생의 강인함을 보여주는 듯하지요.
박수근 기념관을 보고 나오면 2층 계단으로 이동합니다.
계단을 오르면 기념관 지붕길을 따라
뒷산의 박수근 묘와 박수근 파빌리온으로 이어집니다.
뒷산을 오르고 싶었지만, 아이들의 발길은 이미
뜨거운
ㄸㄸ,서웅 화강암과 메탈로 이루어진 독특한 건축물,
박수근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건물입니다.
파빌리온에는 선생의 그림이 비싸서 전시물이 많지 않다는 소리를 듣고,
선생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미술관에 기증해 준
근현대 미술 작품 150여 점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림을 기증해 주신 분들, 참 고마우신 분들입니다.
선생을 위해 헌정한 작품들이지만, 관람자에게는 의외의 득템 ^^
천경자, 이중섭, 김환기 등 유명 작가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건물 한 동에는 선생이 가장 활발히 활동했던 창신동 시절의
집을 형상화한 설치 작품도 있지요(조덕현 님 작품).
박수근 파빌리온에서 이어지는 건물은 기획전시실,
박수근 화백은 생계를 위해 잡지의 삽화를 그렸습니다.
<월간 장업계>에 보냈던 그림과 판화, 직접 그리고 썼던
어린이 그림책 등 다양한 소품들을 볼 수 있는 곳입니다.
건물 입구의 고목은 그림속 나목(裸木)을 닮아 찍어두었지만,
그림의 느낌과는 확실히 다르네요.
선생은 생전에 개인전 한 번 열어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당시는 국전을 둘러싼 미술계의 파벌 다툼이 극에 달했던 시기라서
스승도 계파도 없고,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
지극히 소박했던 화가가 살아가기에는 힘든 시기였지요.
선생을 인정해 준 사람들은 그가 초상화를 그려주었던 미군부대 사람들,
생활이 어려운 그에게 물감을 구해주고 전시회도 열어주었죠.
비록 평택의 미군부대 도서관에서 열린 전시회였지만,
그것이 당시 48세의 중견화가 박수근 선생에게는
처음이자 마지막 개인전이었다고 합니다.
선생의 작품이 해외에서 인정받기 시작할 무렵,
선생은 국전을 둘러싼 계파 싸움과 국전 탈락의 아픔을 겪으며
과음하는 일이 잦아졌고, 1965년 5월 6일 51세의 나이에
간경화로 아쉽기만 했던 생을 마감했습니다.
시대의 아픔을 온 몸으로 겪으면서도 인간의 고귀함을 잃지 않았지요.
현실에 쓸려가지 않고 묵묵히 견뎌내며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간
선생의 항성(恒性)에 존경을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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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유홍준 교수의 글,
"박수근, 그의 예술세계를 되돌아보다" 중 일부를 발췌했습니다.
"그는 진실된 화가였다.
그의 진실된 눈이 포착한, 그러나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외면한 세계의 증인으로서 화가의 몫을 해낸 것이다.
다시 생각해보건대 박수근은 그림이라는 미미한 도구를 갖고
위대한 사상가 못지 않은 인간 정신의 고귀성을 표현했다.
뛰어난 지성이나 예리한 감성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갖고 면밀히 관찰하여
부동(不動)의 형태로 고정시킴으로서 성공했던 것이다.
그래서 당신이 아들에게 가르쳤다는 "더욱더 작아지게 하소서"라는
겸손의 미덕이 새삼 아름답게 다가온다.
그의 그림에서 나오는 서민들이 차라리 거룩한 느낌으로 다가오면서
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치장하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인간 본연의 소박한 자세를 끊임없이 보여준다는 점에서
박수근 미학이 지닌 보편적 가치를 찾아보게 된다."
(유홍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