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봉미산 신륵사 자전거 여행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
고려말 나옹스님의 시예요.
나옹은 친구의 죽음을 보며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고,
20살에 불가에 입문, 여러 절을 다니며 수행을 하다가
양주 회암사에 이르러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회암사는 인도에서 온 고승 지공스님이 세운 사찰로
당시 고려 불교의 중심지였지요. 나옹은 지공스님을 찾아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 10년간 수행을 하고
다시 회암사로 돌아옵니다.
고려에 돌아온 나옹은 귀족 중심의 불교,
재물을 탐하는 불교를 질타하며 맞섰습니다.
사찰에 재물을 받치며 복을 빌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불성을 보라고 가르치며,
백성들에게 사회 개혁에 참여할 것을 강조합니다.
그의 시 "백납가(百衲歌; 백번을 기워 입은 누더기 옷)"는
불교의 타락을 비판하는 대표적인 시입니다.
백번 기운 이 누더기 내게 가장 알맞으니
겨울이나 여름이나 만판 입어도 편안하구나
누덕누덕 꿰매어 천조각 만조각인데
겹겹이 기웠으매 앞도 뒤도 없어라
자리도 되고 옷도 됨이여
철따라 때따라 어김없이 쓰이며
이로부터 고상한 행에 만족할 줄 아나니
음광(飮光)이 끼친 자취 지금에 있구나
백성들은 나옹의 설교를 듣기 위해
회암사로 구름같이 모여들었다고 합니다.
사회의 에너지가 한쪽으로 쏠리면 반작용이 있게 마련이지요.
공민왕 왕사 출신의 스님이 사회 개혁을 외치니
귀족과 기득권층의 반작용이 시작됩니다.
나옹으로 인해 생업에 지장이 생긴다는 상소를 올렸지요.
고려 왕실에서도 위기 의식을 느꼈나봅니다.
왕실은 나옹에게 밀양으로 가 불사하라는 어명을 내립니다.
사실상 수도권에서 추방을 한 것입니다.
이미 병들어 오래 살지 못함을 알고 있었던 나옹은
육로를 이용해 밀양으로 내려가다
충주에서 배를 타고 다시 올라와 신륵사에 머물게 됩니다.
자신이 입적할 장소로 신륵사를 택한 것입니다.
그로부터 한 달 남짓지난 5월 15일 56세를 일기로
나옹스님은 신륵사에서 입적을 합니다.
* * * *
2014년 가을 아들과 둘이서 중앙선 기차를 타고
양평에서 하차, 자전거로 남한강 자전거길을 달렸습니다.
반환점으로 잡은 곳이 여주 봉미산 신륵사.
신륵사 조사당에 있는 지공스님과 제자 나옹선사,
나옹의 제자 무학대사의 영정이 보고 싶었으나
마침 조사당은 보수공사중... ;;
공사장 가림막으로 인해 조사당은 코빼기도 못 보고
돌아서야 했지요.
통도사에 있다는 무학, 지공, 나옹의 영정입니다(왼쪽부터).
신륵사의 영정 그림과 모습이 조금 다르지만,
3대 화상의 그림만큼은 같은 배치, 같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그렸을까가 궁금하기도 하고...
가을, 신륵사 경내를 압도하는 풍경은
나옹이 심었다는 은행나무입니다.
나옹이 꽃아 둔 지팡이에서 싹이 났다는 설이 있지만
같은 얘기가 워낙 많아서...
은행나무 단풍은 장관입니다.
바람에 따라 반짝이는 은행잎의 발광(發光),
오후의 햇살이 투과되며 만들어 낸 노란 빛의 번짐 효과,
하늘과 강의 파란색 배경 위에 펼처진 빛의 예술입니다.
이렇게 노란빛이 절정을 이룬 순간에,
햇빛이 굴절되는 가장 아름다운 시간에
이 나무를 보고 서 있는 자체가 감동입니다.
평상시엔 제1경이었을 강월헌,
가을 한철 은행나무에 밀려 제2경이 되었습니다.
이곳 강월헌은 나옹이 입적을 한 곳,
정자의 이름도 나옹의 호인 '강월'에서 따온 것입니다.
강월헌에 오르는 입구 옆에는 석탑이 있습니다.
보통 사찰이라면 경내 중심인 대웅전 앞에 있어야 할
석탑이 홀로 뚝 떨어져 있지요.
이곳이 나옹화상의 다비식이 있었던 자리,
장작을 쌓고, 나옹을 화장했던 터를 기리기 위해
탑을 세워 둔 것입니다.
탑이 있는 곳에서 내려다보는 여강(남한강)은
언제 봐도 평화롭습니다.
강월헌 뒤쪽의 언덕을 오르면 또 하나의 탑이 있지요.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했던 전탑입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전탑은 모두 5기,
4기는 통일신라시대의 것이고, 신륵사 다층전탑만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 되고 있습니다.
(상륜부 쪽의 탑신에 지붕이 없어 그냥 다층전탑이라
부르지만, 저는 옥개석이 생략된 7층 전탑이라고 봅니다.
이유는 모르지만, 불탑은 항상 3, 5, 7, 9 홀수로 층을 만들죠.
경천사지 10층석탑도 탑신이 생략된 11층이라 생각하지만,
인정하지 않으므로...나홀로 경천사지 11층 탑 ^^)
대웅전 앞에 놓인 또 하나의 탑
유래를 볼 수 없는 대리석 석탑입니다.
보통 우리 석탑은 화강암 재질인데 이 탑은 대리석입니다.
층수 역시 8층. (또 반칙이...)
탑신과 지붕의 비율이 마음에 안들어 예술점수는 50점.
게다가 탑신에는 용 무늬가...
(조폭도 아니면서...)
신륵사 구석구석을 꼼꼼히 보고 싶었지만 해가 기울어 가네요.
자전거를 타고 왔기에 이미 돌아갈 시간을 놓쳤습니다.
부지런히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시간,
한 번 지기 시작한 해는 금방 떨어집니다.
끝없는 지평선이 이어지는 곳,
해가 지고 강가의 저녁 안개가 내리기 시작하니
먼 곳의 산부터 사라지며 한 폭의 동양화로 변해갑니다.
이포보를 지나니 배가 고프더군요.
밤이면 어떻고, 집에 못 가면 어떠랴,
먹고나 가자며 맛집을 찾아 저녁을 먹고 나니 주변은 암흑....
배가 불러 자전거 타기도 힘들고,
아들과 둘이 자전거를 끌고 강뚝을 걸었습니다.
달빛도 없는 밤길을 이런 저런 얘기하며 걸었죠.
어둠 속에서 간간히 들리는 물고기 뛰는 소리,
강물에 돌을 던지는 듯 퐁당! 퐁당! 소리가 납니다.
"물고기는 왜 뛰죠?"
느닷없는 아들의 질문...
물고기들이 하루의 활동을 시작하는 시간이라서...
또는 쏘가리같은 포식자가 활동을 시작해서 도망다니느라...
(물고기들이 뛰는 이유가 뭘까요??)
그렇게 대화하면 1시간을 넘게 걸었나 봅니다.
개군산 고개를 넘고, 다시 20여 분을 자전거로 달리니
양평 체육공원의 불빛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소나기 마을이 있는 도시답게 공원의 네온사인도,
건물의 네온사인도 소나기가 내리는 모습이네요.
(황순원 소설 '소나기'의 배경 마을이 북한강쪽에 있습니다)
시계를 보니 아직 기차가 운행하는 시간,
양평에서 1박을 하고 다음날 자전거로 집까지 가려던
일정을 바꿔 기차를 타고 돌아왔습니다.
아무리 아들과 같이가는 여행이라지만, 불필요한 외박을
삼가야 아내의 저항 없이 여행이 계속 이어질 수 있지요.
하루를 꽉 채운 14시간의 여행,
자동차로 이동하는 것보다 재미있습니다.
뜻하지 않은 야간 행군도 기억에 남네요.
다음엔 조금만 더 거리를 늘려 명성황후 생가까지
갔다 올 예정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