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찾아가게 된 광해군의 묘
그림작가를 만나러 남양주에 가던 날,
약속시간보다 일찍 도착할 것 같아 경춘고속도로를 나와,
사능 앞의 숲속길로 가려하다 엉뚱한 길로 들어섰습니다.
계속 가다보면 큰 길이 나올거라는 생각과 달리
공동묘지가 나오네요.
공동묘지를 넘어 산 중턱쯤 내려왔을 때,
들어가는 입구도 없는 곳에 광해군 묘라는 이정표가 보입니다.
"설마... 이런 곳에... 있겠어" 하며 차를 세우고
철조망 안으로 들어가 보니 광해군의 묘가 맞습니다.
광해의 묘를 처음 본 사람은 좀 당황할 겁니다.
아무리 폐주가 되었다 해도, 15년을 왕으로 지내왔는데,
무덤이 있을 자리도 아닌 곳에, 진입로조차 없다니.....
곡장 뒤쪽으로 가 무덤을 내려다 보면,
가운데 놓인 석등의 뒷편은 경사가 급한 언덕이라
한 사람이 성묘를 하기에도 좁은 공간입니다.
스마트 폰으로 찍은 것이긴 하지만,
공간이 좁아 묘역 전체가 카메라에 잡히지도 않습니다.
망주석과 비석, 문인석, 석등이 전부인 단촐한 무덤이죠.
정면에서 바라봤을 때 오른쪽이 부인인 문성군 유씨의 묘이고,
왼쪽이 광해군의 묘입니다.
반역을 꽤했다는 누명을 쓰고 죽은, 소현세자 후손인
밀풍군의 묘조차 햇볕이 잘 들어오는 양지바른 곳에 있건만....
돌아와 자료를 찾아보니 풍수지리상 이런 곳에 묘를 쓰면
자손이 끊어지는 결손지지라고 합니다.
이 사실을 광해가 안다면... 죽어서도 원통하겠군요.
총탄자국이 난 비석과 세월의 떼가 묻은 구름 문양의
비석 머리는 광해의 덧없는 인생을 상징하는 듯 보입니다.
강화도에 유배된 아들(세자)은 땅굴을 파서 탈출을
시도하다 발각이 되며 자결을 했죠.
세자빈과 광해의 부인 문성군 유씨도 강화도에서 자결을 합니다.
광해군만이 포기하지 않고 복위 소식만을 기다리다
67세로 눈을 감았으니, 어머니의 무덤이 보이는 곳에 묻어달라는
그의 유언에 따라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이네요.
평생을 고독 속에서 살았던 그가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어머니의 품이었습니다.
* * *
광해의 불행은 사실 아버지 선조로부터 시작됩니다.
왕비의 몸에서 태어난 대군(大君)이 아니라,
후궁의 몸에서 군(하성군)으로 태어났던 선조,
신분이 엄격한 조선에서 서자가 왕이 되었으니,
그에게는 평생의 걸림돌이자 열등감의 근원이었죠.
자식에게만은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서자의 딱지였건만,
정비에게서는 자식이 없고, 후궁에게서만 13명의
서자를 낳았습니다.
광해의 위로 임해군이라는 형이 있었지만,
13명의 서자 중 광해가 가장 총명하고 단연 돋보였죠.
하지만 선조는 광해가 서자라는 이유로
18세가 되도록 세자로 책봉하지 않습니다.
광해는 임진왜란으로 쫓기는 상황에서
졸지에 세자가 되지만, 왜란이 끝나자
적자로 대를 잇고 싶은 선조의 갈등이 다시 시작되었죠.
광해가 31살되던 1606년, 마침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가 적자인 영창대군을 낳았습니다.
서자라는 이유로 세자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던 광해.
갓 태어난 아기에게도 밀려야 하는 살얼음 판의 정국 속에서
2년 후인 1608년, 선조가 갑자기 승하합니다.
선조가 승하기 직전, 영의정 유경영에게
광해에게 왕위를 물려준다는 교지를 내렸으나 2살배기
영창대군을 왕으로 세우고 싶었던 유경영은 이를 숨깁니다.
이것이 광해의 분노를 촉발시킨 단초가 됩니다.
광해가 왕좌에 오른 후에도 광해를 지지하는 대북파와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파, 형인 임해군을 옹호하는 파,
이복동생인 능창군을 옹호하는 파 사이에
목숨을 건 싸움이 시작됩니다.
(능창군을 대권주자로 세우는 쪽에서는 풍수가들의
입을 통해 능창군의 집에 왕기가 서렸다는 소문을 퍼뜨렸죠.)
이 피말리는 경쟁자들을 모두 제거해 준 이가 대북파였으니
광해는 이들의 은혜를 값기 위해 "의리~~"의 정치를 펼칩니다.
하지만 대북파에 의한 권력 독점이 서인들의 반발을 불러왔고,
능양군(인조)을 옹호하는 서인들의 쿠데타로
왕좌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왕위에 오른지 15년 만의 일이지요.
(광해는 사촌동생인 능양군을 대권주자로
생각하지도 않았으니, 방심한 것입니다.)
폐위의 책임은 결국 스스로 져야 할 문제이긴 하지만,
당쟁의 구도를 만들어 준 아버지 선조도 큰 몪을 했습니다.
신중하고 총명했던 그가 대북파의 책동에 넘어간 이면에는
서자로서 당해 왔던 그간의 외로움과 설움도 있었겠죠.
사후에도 이런 설움은 계속 이어지는군요.
광해군의 묘는 일반인에게 공개하지 않습니다.
"광해"라는 영화 덕분에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던 것인지,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 2022년 12월 31일까지
출입을 통제한다는 공고문이 붙어 있습니다.
현재 광해군 묘로 들어가는 담장의 쪽문을 자물쇠로 잠궈두었죠.
그가 폐위되고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당시,
집 둘레를 가시가 많은 탱자나무로 울타리를 만들고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는 "위리안치"라는 형벌을 받았습니다.
오늘날까지도 광해는 울타리 안에 갖혀있는 신세가 되었군요.
무덤앞의 문인석 표정도 슬픔을 누르고 있는 듯 보입니다.
죽어서도 어찌 이리 모진 운명일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