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마지막 수도, 부소산성을 가다
부소산성, 사비시대 백제의 왕성입니다.
산성이라해서 남한산성이나 공산성 같은 성을 떠올리면
실망하게 되죠.
밖에서는 성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토성입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이정표가 없어 잠시 헤맸죠.
빈 건물터들만 보이고, 어디로 가야할지를 알리는
표지판도 없습니다.
우선 눈에 들어오는 건물이 옛 부여박물관 자리입니다.
건축가 김수근씨의 작품으로 일본 신사를 닮았다 해서
친일논란이 있었던 건물이죠.
이 건물을 따라 올라갔더니 (구)부소산성 입구가 나옵니다.
참고로 주차장에서 부소산을 바라보고 오른쪽 길로 가야
정문 매표소가 나옵니다.
산성 한 바퀴를 돌아보니 아이들이 돌기에는 넓은 지역이네요.
가장 짧으면서도, 중요한 것을 다 볼 수 있는 코스가
정문(사비문) → 삼충사 → 반월루
(삼충사 왼쪽 산길로 올라가는 지름길이 있습니다)
→ 백화정(낙화암) → 고란사를 보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초등학생을 인솔해 수학여행을 왔다는
선생님이 가르쳐 주시더군요.
삼천궁녀의 혼을 달래기 위해 세웠다는 백화정입니다.
백화정 바로 아래가 삼천궁녀가 떨어졌다는 낙화암이죠.
낙화암에서 바라보는 풍광은 일품입니다.
백마강은 이곳 낙화암을 기점으로
반달모양으로 굽으며, 부여시내를 감싸며 돌아요.
이곳에서 정말 삼천궁녀가 뛰어내렸을까요?
부여시로서는 이 부분이 참 고민이었을 겁니다.
삼천궁녀의 전설로 인해 부여를 찾는 사람들이 많은데,
거짓말은 할 수 없고….
부여시의 선택은? 박물관에서 사실을 밝히는 군요.
부여박물관의 한 코너에 낙화암에 대한 기록을 모아 두었죠.
“삼천궁녀”라는 말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15세기" 입니다.
신용개, 김전, 남곤 등이 엮은 시문집 <속동문선> 중
김흔의 <낙화암>이라는 시에서 처음 등장하죠.
:
약같은 충신의 말 처음은 입에 써서
호강만 누리더니 끝내는 후회하네
"삼천 궁녀"들이 모래에 몸을 맡겨
꽃 지고 옥 부서지듯 물 따라 가버렸네.
:
김흔의 <낙화암>은 백제의 멸망을 회고하는 시로,
극적인 표현을 위해 과장해서 썼던 단어가
오늘날의 "삼천궁녀 이야기"로 각색되었을 것입니다.
그나마도 이런 전설이 있어야
아이들이 역사에 관심을 가지겠죠?
백화정에서 고란사로 가려면
경사가 급한 길을 내려가야 합니다.
고란사는 백제 말기에 지어졌다는 설이 있을 뿐,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는게 없군요.
고란사 뒤편에는 고란정이 있습니다.
여기서 정은 “우물 정(井)”자죠.
커다란 바위 틈 아래서 샘물이 올라옵니다.
백제의 왕들이 마셨다는 물로, 왕에게 바칠 때는
고란초를 띄워 고란정의 물임을 알렸다고 합니다.
그런대로 물맛은 좋습니다.
한 번 마시면 3년이 젊어진다는 말에 3잔을 마셨죠. ^^
이 약수에는 이런 전설이 있습니다.
옛날 자식이 없던 노부부가 자식 갖기를 소원했어요.
할머니는 한 도사로부터 고란초의 부드러운 이슬과
바위에서 스며나오는 약수가 효험이 있다는 말을 듣고
할아버지를 고란사로 보내 그 물을 마시게 했습니다.
그런데, 밤이 되어도 할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어요.
다음날 아침, 할머니가 약수터를 찾아가니
갓난아기가 할아버지 옷을 입고 누워있었답니다.
아뿔사! 한잔 마시면 3년이 젊어진다는 말을 전해주지
않은 것입니다. 약숫물을 많이 마신 할아버지는
그만 갓난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나도 회춘하고 싶다고!!)
이곳에서 고란초를 찾느라, 그리고
고란사의 벽화를 감상하느라 잠시 머물러 있었죠.
그 사이 수학여행 온 초등학생들 여러 반이 다녀갑니다.
수박 겉핥기식의 설명은 그렇다 치더라도,
"고란초는 어디 있어요?" 하는 아이들의 질문이
하나같이 무시당하더군요.
고란초 사진 한 장이라도 붙여 놨으면 이런 일은 없을 덴데요….
선생님들을 괴롭혔던 고란초입니다.
고란사에서 처음 발견되어 "고란초"라 불렀죠.
겨울에도 잎이 지지 않는 상록성 식물로,
습기가 많은 바위틈에서 자랍니다.
처음에는 고란사에서만 자라는 것으로 알려지며,
멸종위기 식물로 관리되었으나
자생지가 여러 곳이 발견되며 2급 보호종으로 낮춰졌습니다.
헌데, 어찌된 연유인지 아무리 찾아봐도
고란초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결국 다른 지역에서 찍은 고란초의 사진을 올립니다.
<들꽃세상> 김종기 님이 제공해 준 사진으로
강화에서 찍은 것입니다.
고란사 벽에 그려진 탱화입니다.
삼천궁녀의 설화를 그린 것이죠.
이 그림 외에도 노리사치계가 일본에 불경을 전하는 그림,
백제 왕에게 고란사의 약수를 올리는 그림,
백제로 유학 온 일본 비구니에 대한 이야기 등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부소산성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사자루입니다.
달을 구경하기 위해 지은 송월대 자리에,
임천면 관아 정문을 이리로 옮겨 “사자루”라 이름을 붙였습니다.
가장 높은 곳에 있지만, 나무에 가려 전망은 좋지 않습니다.
태자들이 산책했다는 태자골 숲길로 들어서니
다른 세상에 들어온 듯합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이들 재잘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맴돌더니, 갑작스런 적막이 무섭게 느껴지네요.
마치 돌발 상황이 일어날 것 같은….
아무도 없는 길, 모든 것이 멈춘 듯한 고요함 속에
외딴집이 보입니다.
삼천궁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궁녀사"입니다.
하얀색 천으로 주변을 가린 그림이
천의 색과 대비되며 선명하게 다가오네요.
이렇게 한적한 곳에서 하루 종일 사람을 기다리고 있으니,
그림이지만 참 외로워 보였습니다.
태자들의 산책로는 영일루에서 끝이 납니다.
제법 긴 산책길이었죠.
영일루는 백제의 왕이 아침 해를 맞이하던 곳입니다.
2층 누각을 올라가 보니 현판의 글씨가 멋있군요.
뭔 자인지는 읽을 수 없고, ^^
집에 와 찾아보니 寅賓出日(인빈출일),
“삼가 공경하면서 뜨는 해를 맞이한다”는 뜻입니다.
하루를 이런 마음으로 맞이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천장의 오른쪽에는 청룡이, 왼쪽에는 황룡이 있는데,
황룡만 여의주를 물고 있으니, 백제의 왕들은 이곳에서
아침마다 황제를 꿈꾸었던 것은 아닐까요?
영일루를 지나고 나니 비로서 토성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여기부터 산책길을 버리고 토성길을 따라갔죠.
부소산성에서 가장 전망이 좋다는 반월루입니다.
부여 시내 전체를 조망할 수 있죠.
사비성을 “반월성”이라 부르는 이유도
이곳에 서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올라가서 직접 보세요. ^^
삼충사.
백제의 3충신인 "흥수, 성충, 계백"을 모신 사당입니다.
충신을 모신 사당답게 하체는 강인하면서도,
날개를 펼친 듯한 지붕의 곡선이 힘있어 보입니다.
폭이 좁은 용마루에, 양끝은 백제 고유의 치미로 장식했군요.
추녀마루가 3단으로 된 것도 다른 건축물에서는
보기 힘든 모습입니다.
사당 안에 안치된 흥수, 성충, 계백의 영정입니다.
말년의 의자왕은 김유신이 보낸 첩자 “임자”와,
미모의 무당 “금화”의 이간책에 넘어가
성충을 감옥에 보내고, 흥수를 귀양 보내죠.
흥수는 귀양지에서도 신라군과 당을 막을 수 있는 계책을
의자왕에게 보내줍니다.
"당나라 군사들은 멀리 바다를 건너 왔으므로,
물에 익숙치 못해 피곤해 있을 것이다.
그들이 육지로 올라와 기운을 회복하지 못할 때 치면,
당나라만 믿고 있던 신라도 머뭇거리며
공격하지 못할 것이다."
성충은 의자왕을 바로잡기 위해 감옥에서
단식을 하다 임종을 맞게 됩니다.
성충이 죽는 순간 의자왕에게 간한 말은
흥수가 했던 것과 똑같은 말입니다.
"육로는 탄현을 막고, 수로는 기벌포를 막아라."
계백은 5000 결사대를 이끌고 황산벌에서
5만의 신라군을 상대로 4전 4승의 전과를 올립니다.
<삼국사기>에도 "힘이 모자라 죽었다." 라고 써있는 것처럼
마지막까지 모든 힘을 다 쓰고, 더 이상 쓸 힘이
없는 상태에서 최후를 맞이합니다.
그야말로 장렬한 최후죠.
이렇게 3명의 충신들과 함께 700년의 백제 역사는 끝을 맺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