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머리 독서법>
최승필 저 | 책구루
국어는 지식을 가르치는 과목이 아니예요.
글을 읽고 해석하는 능력을 요구하는 과목입니다.
즉 사회나 과학처럼 문장을 읽고 답을 찾는 게 아니라
글을 읽고 어떤 상황인지를 이해해야 하는 과목이예요.
이야기나 문학의 기본 구조는 직접적인 표현 대신,
특정한 상황을 주고 독자가 주인공의 감정에
이입되는 "정서적 추론 과정"을 필요로 합니다.
책을 통해 지식을 얻거나 답을 찾는데만 익숙한
아이들, 또는 마음이 급해 건성으로 읽는 아이들은
등장인물의 감정에 동화되지 못하고, 주어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공부머리 독서법>의 저자 최승필님은
지식책만 보거나, 책을 속독으로 읽거나,
질적인 독서가 아닌 양적인 독서에만 치중하거나
주구장창 만화만 읽는 아이들이 대체로 이런
경향이 강하다며, 2주에 한 권을 읽더라도
깊이 읽고, 생각하며 읽는 정독의 과정을 거칠 것을
추천합니다.
책마다 읽는 방식이 다르긴 하지만,
틀린 말이 아니기에, 내용 일부를 발췌 했어요.
책은 많이 읽는데, 국어 점수가 낮다거나,
이해력이 떨어지는 것 같다면, 이 책을 읽어보세요.
<방관자>라는 책의 도입부로 문제를 냈습니다.
에릭 헤이스가 처음 그를 봤을 때,
데이비드 할렌백은 뛰고 있었다.
뛴다고 했지만, 제대로 뛰는 건 아니고 짧은 다리로
비틀거리며 뒤뚱거리고 있었다고 해야 맞을 것 같다.
그렇게 뒤뚱거리며 달려오다 두려운 듯
뒤를 돌아보는 순간 발이 겹질려 앞으로 넘어질뻔했다.
할렌백은 잠시 숨을 고르다가 비틀거리며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할렌백은 어떤 곳을 향해
달려가는 게 아니라, 어떤 곳에서 벗어나려는 중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도망치고 있었다.
-<방관자> 제임스 프렐러 지음 (미래인) 중에서
<방관자>의 도입부는 상황입니다.
데이비드 할렌백이 도망치고 있고, 에릭 헤이스가 그걸
바라보고 있는 상황이죠. 하지만 아이의 머릿속에서는
그 이상의 생각과 감정들이 순간적으로 일어납니다.
'에릭 헤이스가'라는 문장의 첫머리를 읽는 순간 아이는
에릭 헤이스의 시선으로 이 상황을 바라보게 됩니다.
형식적으로 파격적인 작품이 아니라면 아이는 아마도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에릭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따라갑니다.
이야기의 시작과 함께 등장한 에릭은 주인공이거나
적어도 사건의 주요 관찰자일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아이가 에릭 헤이스의 시선을 통해 가장 먼저 바라보는
대상은 데이비드 할렌백입니다. 그런데 뛰고 있군요.
아이는 할렌백의 감정을 느낍니다. '겁에 질려있어!',
'다급하게 도망치고 있어!' 아이의 마음이 할렌백의
두려움과 다급함에 공명을 일으킵니다.
할렌백의 두려움을 깊이 공감하면 할수록
책을 읽는 아이의 긴장감은 더 높아집니다.
당연히 이야기도 더 재미있게 느껴지겠죠.
주의를 기울여 보실 점은 이 짧은 글 속에
감정을 표현한 단어가 '두려운 듯'이라는 단어
하나뿐이라는 점입니다. 아이는 직접적인 표현이 아니라
상황을 통해 등장인물의 감정을 느낍니다.
일종의 '정서 추론'이 일어나는 거죠.
이렇게 상황을 통해 정서를 전달하는 것은
이야기의 기본 문법 중 하나입니다.
연이어 다양한 생각이 교차합니다.
'할렌백을 쫓는 누군가가 있는 게 틀림없어, 도대체 누굴까?'
라는 의문이 들고, '저렇게 다급하게 도망치는 걸로 봐서는
추적자가 곧 나타나겠는걸'이라는 생각이 스쳐지나가고,
그들이 위험한 존재라면 에릭 헤이스도 해치려 들지 않을까?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아라는 불안감도 들게 됩니다.
물론 초보 독서가인 아이가 이런 생각들을
구체적인 언어로 명징하게 떠올리는 것은 아닙니다.
소설의 활자를 부지런히 읽어내려가면서 자기도 모르게
'생각과 감정의 덩어리'로 이런 것들을 느끼게 됩니다.
질문이 던져졌을 때 비로소 아이는 자기가 느낀 생각과
감정의 덩어리를 구체적인 언어로 떠올리게 되죠.
1. 다음 중 이 장면 다음에 일어날 일로 가장 알맞은 것은?
① 에릭 헤이스는 농구를 계속했다.
② 에릭 헤이스는 집으로 돌아갔다.
③ 데이비드 할렌백이 에릭 베이스에게 물을 달라고 했다.
④ 할렌백이 떠난 직후, 한 무리의 아이들이 나타나
에릭 헤이스에게 할렌백을 보았느냐고 물었다.
②, ③, ④번은 모두 있을 법한 일입니다.
할렌백을 보고 불안을 느낀 에릭이 집에 돌아갔을 수도 있고,
헐레벌떡 달린 할렌백이 물을 달라고 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중에 가장 있을 법한 일은 ④번입니다.
할렌백은 겁에 질린 채 도망치고 있었습니다.
물을 달라는 여유를 부리기는 힘들겠죠.
또 다급하게 도망치고 있다는 것은 두려움의 대상이
바로 뒤에서 쫓아오고 있을 가능성을 암시합니다.
할렌백이 지나가고 연이어 추격자가 나타났을 테니까
에릭이 집으로 돌아갈 시간적 여유가 부족했을 거라고
추론해볼 수 있습니다. 또 그 정도 일로 도망칠 만큼
에릭이 겁쟁이라는 단서도 없고요.
이야기책을 읽는 동안 발생하는 생각과 감정의 덩어리는
아이의 추론능력과 공감능력을 향상시킵니다.
그리고 이 능력들은 국어 시험뿐 아니라
수능에서도 큰 힘을 발휘합니다.
그 효과는 몹시 커서 10개월에 200권만 정독으로 읽어도
수능 국어영역 편집본 평가점수가 평균 10~20점 정도
오릅니다.
수능 국어영역에서 수험생들이 가장 많이 틀리는 문제는
어려운 과학 관련 설명이나 철학 논술문이 아닙니다.
지문은 쉽지만 문제가 어려운 현대소설 문제들이지요,
책을 읽을 때 발생하는 생각과 감정의 덩어리는
아이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아이는 이 덩어리가
크고 두텁고, 어떤 아이는 작고 얇습니다.
방관자의 도입부를 보고 긴장감과 불안함, 궁금증을
느끼는 아이가 있는 반면 '도망가고 있구나' 하고
건조하게 받아들이는 아이도 있다는 거죠.
초보 독서가보다 숙련된 독서가가,
속독을 하는 아이보다 정독을 하는 아이가,
억지로 읽는 아이보다 재미있게 읽는 아이가
더 크고 두터운 생각과 감정 덩어리를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이 크기와 두께의 차이가
독서 효과의 차이를 결정합니다.
한마디로 같은 분량의 책을 읽는 동안
더 많은 것을 생각하고 느낄 수 있었던 겁니다.
(81-84쪽)
